택시라는 한정된 공간은 손님과 택시기사라는 관계를 떠나서 처음 만난 사이가 마치 오랜 친구가 된 듯, 넋두리와 담소를 나눌 수 있게 하는 매개체이다. 30년 전의 작품이라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을지도 모르겠지만 흡연문화가 발달된 유럽의 낙후된 소형택시 이미지는 번쩍이는 중형택시를 타고 다니는 우리나라의 쾌적한 모습과 달리 클래식한 매력을 느끼게 한다. 먼지가 끼여 있는 창문과 담뱃재가 흩어져 있는 바닥 그리고 담배연기와 섞인 구형 차의 독특한 기름 냄새와 털털거리는 엔진소리는 비위생적이라는 편견을 잠식시켜줄 오래된 것 만의 매력이다.
나름 낭만적인 이미지를 연상하며 처음 접한 파리의 코르디부아르 출신 택시기사를 보면서 홍세화의 <빠리의 택시운전사>가 떠올랐다. 프랑스의 보잘 것 없는 소형 렌탈택시는 할증요금을 받을 수 있는 야간운행을 12~16시간 동안 해야 하는 이민자, 망명인의 애환이 담긴 전유물이다.
첫 주인공인 그 가난한 흑인 기사는 맹인 여성승객에게 호기심을 가지게 되고 그 둘은 서로 다른 관점으로 만물을 평가하는데, 보이는 것을 가장 먼저 생각하고 의지해 살아가는 '우리'를 대변하는 운전기사와 사람과 사랑, 색깔 모든 것을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이미지로 표현하는 시각장애인 손님의 행동, 언어는 색다르고 참신하다. 어쩌면 멀쩡한 눈을 가지고도 교통사고를 내는 주인공과 같은 '우리'는 오감을 조율하는 시각장애인보다 훨씬 둔감하며 단순한 사고를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택시에서의 수많은 군상과의 짧은 만남은 갈수록 즉흥적이고 건조해지는 현대사회를 대변한다. 인간은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인해 그냥 지나쳐버리는 특별한 것들을 놓치기 십상인데,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강박적으로 생각해 내야하는 예술가들은 더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생각하기 위해 오히려 눈을 감고 명상에 잠기듯이, 가치 있는 창작물은 구태의연한 시각을 벗어나야 비로소 구현되는 경우가 많다.
구형택시와 같이 낡은 것은 냄새나고 쓸모없다는 일반적 시각의 편견에서 접근한다면 그 가치가 퇴색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성형열풍과 같은 사회현상은 시각적인 아름다움, 외모지상주의가 만들어낸 물질적, 정서적 낭비로 볼 수도 있고, 간편함, 신속성, 일회성으로 대표되는 인스턴트문화와 같이 그만큼 짧은 시간동안 멋있게 눈에 띄어야 하고 그렇지 않으면 도태되는 경쟁문화는 미처 발견하지 못한 예술적 가치들을 쉽게 잃어버린다.
로마의 택시운전사는 혼자서나 다른 사람이 있던 없던지 간에 힙합 래퍼처럼 정신없이 떠드는 수다꾼이다. 하지만 자신에게만 쏠려있던 관심은 죽어버린 손님에 대한 무관심이 되고 시체를 벤치에 버려두고 가는 파렴치함으로 변해버린다. 또, 실직된 친구를 위해 같이 울며 화를 내던 2명의 헬싱키의 취객은 실직자의 퇴직금으로 택시를 얻어 타고는 그냥 가버린다.
영화는 누군가의 슬픔에 함께 울어주는 정서적 공감은 마음껏 내어놓지만 나에게 피해가 온다고 생각하면 가차 없이 버리고 직접 도움을 줄 필요성은 없다고 생각하는 '이성적 본능'을 그대로 담고 있다. 생각과 실천의 괴리감이 느껴지는 계산적 행동을 힐난할 수도 없는 것이 나도 동시대를 살아가는 인간이기 때문이다. 술 취한 손님을 길바닥에 남겨두고 훌쩍 떠나버리는 운전기사와 같이, 택시 안에서는 같이 웃고 울어줄 수 있는 친구지만 목적지에 도착하면 모르는 사람이 되는 현대사회의 하찮은 인연의 단면이 좁은 공간의 택시라는 만화경이다.
같은 시간, 비슷한 조건에서 만나게 되는 서로 다른 인간의 모습들을 오로지 같은 택시에 탄 듯이 단순한 모습으로만 보여주는 극소주의(Minimalism)적인 구성은 평범한 일상의 관찰이라는 측면에서 그 효과를 극대화하고 있으며 독립영화에서만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연출이다. 세상은 그 누구를 위해서도 존재하지 않으며 택시처럼 수많은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잠시 들렸다 가는 곳이라는 것을 말해 주는듯한 카메라는 폐쇄회로TV처럼 그들을 비추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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