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의 무게를 짊어지고 몸이 망가지는지도 모른 채 살아왔다. 가족들이 부족한 것 없이 오손도손 사는 것이 곧 본인의 행복이었고 꿈이었다. 그러나 그 꿈은 다가갈수록 멀어져갔고, 분명 가장 가까이 있는데 동전 반대편처럼 서로를 볼 수 없었다.
한국을 대표하는 전설적인 영화를 수없이 찍어왔지만, 모든 희노애락의 디테일이 담겨져있는 송강호의 연기를 대표하는 영화로는 의외로 묻혀있는 한재림 감독의 '우아한 세계 (2007)'를 최고로 꼽고 싶다.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송강호만이 보여줄 수 있는 분명 슬픈데 뭔가 웃기는 고유의 '웃픈' 연기는 이 영화에 농축액처럼 담겨져 있고,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관점에서 애달픈 감정을 유쾌한 웃음으로 잘 희석하여 그려냈다.
조폭과 가장의 무게라는 소재는 상투적일 수 있지만, 마디마다 적절한 시추에이션 코미디를 섞어가며 클리셰를 파괴한다. 진지할 수도 있는 차량 추격씬에서마저 주차요원의 시크한 반응과, 격정적인 감정으로 페이드 아웃해도 됐는데 굳이 걸레로 수습하는 처량한 모습까지 보여주며 끝날 때까지 웃음을 자아내는 것이 과연 압권이다.
분명 주인공은 극도로 처절한데 보는 관객은 배꼽을 잡는 상황 연출은 송강호와 이 영화만이 줄 수 있는 쾌감이다.
이거 어떡할거야? 네가 책임질거야?
그토록 존경하던 회장님에게 던지는 강인구의 대사는 올드보이에서 감옥에 갇히기 전의 오대수가 연상된다. 힘껏 발버둥칠수록 배배 꼬이기만 하는 실타래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처럼 보인 상황도 오대수의 하루처럼 대충 수습이 되어있었다.
그 과정에서 깨닫는 것은 개처럼 일했지만 가정에서도 직장에서도 그가 없어야만 비로소 모두가 행복하다는 것이기 때문에, 보는 내내 인구에게 감정이입을 하게 된다.
내 능력에서 할 수 있는 전부를 해줬는데, 이제와서 모두가 날 싫어하면 뭐 어쩌라고?
니들은 참 인생 쉽게 산다. 떳떳하지 못한 사람이라며 욕하고 멀리하는데, 정작 수혜는 다 받아먹고 좋아라하면서···. 누가 해달라고 했냐고? 그러고 있잖아 지금.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책임감과 희생정신으로 살아왔지만 곁에 아무도 없는 결말은 많은 아버지들에게 웃픈 인생의 부질없음을 새긴다. 영악하게 받아먹기만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이제 늙어서 쓸모 없어진 남자는 혼자 쓸쓸히 사라져야 하나. 고마움을 바라는 것도 어리석지만, 그렇다고 너무 몰라주면 바다에 씻겨가는 모래성처럼 허무하고 고독할 것 같다.
당장 슬프고 부질없고 허무하고 고독하지만, 그래도 인생이라는 희극은 멈출 수 없고 영화의 영어 제목처럼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 원치 않는 시나리오라도 '나'라는 배역은 바닥만 보고 걷는 나귀처럼 그렇게 움직이게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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