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타나토노트로 본 유쾌한 죽음

moonstyle 2022. 5. 20.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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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나토노트(Les Thanatonautes, 1994)

 

왜 모두 죽고 나면 사라지는 걸까

 

 

이 세상에서 나의 자아, 존재가 완전히 사라지는 두려움은 이뤄 말할 수 없다. 생전에 인간이 그렇게 상한가 없는 욕심을 추구하는 것도 짧은 생에 다 가지고 다 해보려는 본능과, 죽고 나서 어떻게 될 지 모르기 때문일 것이다.

 

미지의 영역을 향한 인간의 욕심과 호기심은 신대륙이나 극한 오지를 넘어 지구 밖에 이르기까지 정복의 깃발을 꽂아왔다. 죽음은 결코 쉽게 다가갈 수 없는 것이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시공의 초월과 더불어 사후세계도 언젠가는 인간이 정복해야할 목표가 돨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미지의 분야들에 비해 사후세계에 대한 과학적 정보는 사실상 없기 때문에, 그 공포는 지구가 평평하다고 믿던 시절 대서양을 지나면 끝없는 낭떠러지로 추락할 것이라는 막연한 두려움과 비슷하며, 우리가 둥근 지구의 실제 모습을 당연히 알고 있듯이 미래에도 죽음을 두려워한 지금의 사람들을 비웃을 수도 있을 것이라는 상상도 해본다.

 

우주여행도 하는 고도의 문명에서 이론적인 진척이 거의 없는 것은 금기의 영역이라는 접근성의 문제와 영적 체험담과 같은 것은 미신적인 성격이 강해 가십거리로 여겨질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비과학적으로 허무맹랑하게 비춰지는 것들도 참신한 아이디어로 죽음에 대한 유쾌함을 제공해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타나토노트(Les Thanatonautes, 1994)'를 읽을 때에는 다르게 느껴진다.

 

 


무겁고 어두운 소재인 죽음 다루고 있으면서도 시종 웃음을 자아내는 작품은 작가의 상상력에 각종 과학적 정보와 신화, 종교가 제시하는 내세와 관련된 문헌들을 결집하여 영계(靈界)를 탐험하는 사람들, 타나토노트에 관한 이야기를 만들어 냈다. 사람을 각종 약물을 통해 빈사상태(코마)로 만든 후, 영혼이 되어 날아올라 영계의 경이로운 모습을 하나씩 벗겨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들여다보면 사후세계가 윤회설을 바탕으로 한 생의 심판대라는 여러 종교의 신화 내지 통념을 버무려놓은 설정이다.

 

사자(死者)들이 심판을 받기 위해 가는 은하 중심으로 가는 머나먼 길이 타나토노트들에 의해 점차 관광지처럼 변해가고, 여행하는 사람이 많아질수록 인생이 덧없이 느껴지고 급기야 그곳에 머무는 사람이 늘어난다. 늘 두려워하고 경외하던 저승까지 상품광고로 도배가 되는 지경에 이르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며 인간의 끝없는 욕심을 블랙코미디로 잘 엮어낸다.

 

 

만화로도 출시되었다

 

우디 앨런이 말한 ‘언젠가는 죽게 될 것을 알기에, 인간은 진정으로 느긋할 수 없으리라.’에 대한 반박으로 책에서는 시간의 의미는 사라지고 희망도 한계도 두려움도 사라지며 자기 삶을 끝낼 자유조차 사라지는 불멸의 끔찍함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면서 다행히 언젠가는 우리에게 죽음이 찾아올 것이며 우리는 진정으로 느긋할 수 있다고 말한다.

 

필멸(必滅)의 숙명을 인간은 절대 벗어날 수 없기에 지금의 문명을 이루어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르며 이 유용한 도구가 없었다면 지금쯤 지구는 생지옥이 되어있을 수도 있다. 신은 탁월한 선택을 한 것이고 모든 문제는 죽음이라는 조절장치로 해결된다.

 

 


사후세계는 인간이 과학적으로 탐사하기 전에는 정답이 없다. 따라서 작가는 소설을 통해 죽음에 대한 태도의 전환을 말해주고 있다. 삶에 있어서는 죽음을 늘 염두 해두며 가치있게 살아가고 죽음을 맞이하면서는 영계를 탐사하러 가는 것과 같은 모험적인 즐거움을 가지라는 것이다. 언젠가는 찾아올 죽음에 대한 두려움보다는 다음 세상을 위해서 열심히 살아가며 편안하게 눈을 감는 것처럼 행복한 삶은 없다고 믿고 싶다.

생사의 갈림길에서 모두가 이 소설의 익살같이 유쾌할 수 있을까. 죽음을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자신의 인생에 얼마나 만족했는지에 따라 달려있다. 무한한 잠재력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녹슨 기계처럼 멈춰있다면 베르베르의 표현처럼 '집행 유예 상태에 있는 시체'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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