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철도원 鉄道員(ぽっぽや)

moonstyle 2024. 2. 19. 2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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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 모를 때 그저 지루하게만 봤던 기억이 있다. 도대체 히로스에 료코는 언제 나오냐며 마치 낚시당한 것처럼 불만을 토로하며 생각나는 것은 이렇게 경례하는 모습뿐이었다.

 

 

철도원(1999)

 

 

세기말 일본문화 개방과 러브레터의 인기에 발맞추기도 했고, 일본의 국민여동생의 출연으로 주목을 받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이며, 본인처럼 내용은 몰랐어도 포스터나 이 사진은 기억하는 사람도 많다.

 

 

엉뚱한 번역

철도원 한국 번역판은 DVD고 재개봉이고를 불문하고 누가 번역했는지 모를 황당한 추측성 번역을 그대로 쓰고 있어, 영화의 내용과 감상을 상당히 곡해시키고 있다. 그것도 일부분이 아니라 전체적으로 번역이 이상하다.

 

자막사이트에서 받을 수 있는 SMI 파일도 동일한데, 상당히 오래된 영화라 별다른 수정도 없이 똑같은 내용으로 떠돌고 있는 중이다.

 

대표적인 예를 하나 들면, 철도원의 애환을 나타내며 영화 속에서 읊는 자조적인 서정시는 중요한 감상 포인트인데도 제멋대로 번역을 해놔서 어이가 없다.

 

[원 대사]

拳固のかわりに旗を振り
涙のかわりに笛吹き鳴らし
わめくかわりに裏声しぼる
ポッポヤか· · ·

[DVD 자막]

건강을 해쳐가며 깃발을 흔들고
눈물을 삼켜가며 호각소리를 울린다
눈 속에 슬픔을 묻어라
철도원이여

[필자 번역]

주먹 대신 깃발을 휘두르고
눈물 대신 호각을 울리며
고함 대신 호령*을 지르는
철도원이여


* 裏声(가성을 뜻하는 말)
정확히는 「喚呼の裏声」 로, 철도원들이 ‘출발진행!’, ‘신호양호!’ 등 지적확인 환호를 하는 소리를 말한다. 철도마니아가 아닌 이상 관람자에게 적절한 의역이 어려우므로 원작 소설 번역판의 ‘호령’을 가져옴.

 

 

DVD 자막은 의역이라 하기도 민망한, 번역가의 자질이 의심되는 한심한 수준이다. 사생활과 가정마저 포기하고 인생을 바친 철도원의 비애를 함축하는 시인데, 황당하게도 "건강"이 나오고(발음이 비슷해서 착각한 듯), "눈 속에 슬픔을 묻어라(?)"니...

 

 

2015년 리마스터 재개봉판의 예고편인데, 역시나 실제 대사와 자막이 전혀 다르다

 

 

러닝타임 내내 대학생 번역 알바가 마감시간에 쫓겨 잘 안 들리는 부분을 짐작으로 대충 쓴 듯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으며, 이 정도는 작품을 훼손하는 지경이라고 본다.

 

본작 말고도 아직도 외화를 수입해 올 때 이상한 번역으로 뭇매를 맞는 일이 많다고 한다. 번역가도 작품을 곱씹으며 영화를 깊이 있게 감상할 줄 알아야 하며, 원작도 읽어보고, 잘 모르는 분야는 취재도 해야 한다. 철도인들이 지적확인을 어떻게 하는지 잠깐이라도 확인했다면 어색한 "신호 OK"가 아니라 "신호양호"라고 했을 것이다.

 

또, 개인적인 심정 같아서는 제목과 대사의 철도원도 시적허용을 더해서 "철도쟁이"로 바꾸고 싶다. 의미나 상징, 맥락으로 볼 때 '포포야'라는 아기자기한 이름은 철도원이라는 정형적 한자 번역체보다는 '-장이'가 어울리는 것 같다. 이미 굳어져버려서 어쩔 수 없지만.

 

 

반일감정

일본 영화를 수입까지 해놓고는 일본문화에 대해서 불편했던지 위의 경우보다 더, 완전히 의미를 바꿔놓기도 했다. 주인공이 천천히 명확하게 하는 발음이라 일본어 초심자도 잘 들리는 부분인 것을 감안하면 의도된 왜곡 번역으로 사료된다.

 

[원 대사]

おじちゃんはな、
おじちゃんの親父の言葉を信じて、実行してきたんだ。
デゴイチやシロクニ*が戦争に負けた日本を立ち上がらせ引っ張るんだって。
それでおじちゃん、機関車乗りになった。

* 증기기관차 모델인 데고이치(D51)와 시로쿠니(C62)

[DVD 자막]

아저씨는 말이야, 우리 아버지 말씀을 믿고 살아왔어
"끊임없이 이어진 레일처럼,
하루도 빠짐없이 달리는 기차처럼,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고
그래서 아저씨는 기관사가 된 거야

[필자 번역]

아저씨는 말이야, 우리 아버지 말씀을 믿고 실천해왔어.
"증기기관차가 패전한 일본을 일으켜서 끌고 간다"고.
그래서 아저씨는 기관차를 타게 됐어.

 

본작은 정치색을 전혀 드러내지 않으며, 해당 대사도 친구의 아들에게 선배 철도원으로서의 사명감을 전하기 위해 아버지로부터 들었던 의지를 잠깐 언급하는 수준이다. 정 신경 쓰인다면 저 문장에서 '패전한'만 빼도 된다.

 

'일본을 일으켜 세우자'는 전후세대의 외침은 경제재건에 이바지하는 직업의식이라는 시대상이 담긴 관념적인 표현인 데다가, 영화의 메타포와는 무관하다.

 

그럼에도 이 단 하나의 대사를 빌미로 군국주의 운운하던 리뷰까지 있었다고 하니, 반일감정마저 감상을 훼손하고 있는 것이다.

 

 

불편한 감정을 넘어

현실적인 면에서, 일본에서도 철도원을 보고 불편하다고 느낀 사람들이 더러 있다고 한다. 사랑하는 가족의 죽음마저 제쳐두면서까지 플랫폼에 바보처럼 우직하게 서서 승객도 없는 빈 열차를 기다리는 것이 그렇게까지 의미 있는 일인가 하는 것이다.

 

 

 

 

지나고 보니 폐선되어 역과 철도가 있었는 지도 모를 정도로 황량한 벌판으로 사라진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시골역장에게 남은 것은 회한과 자기만족 밖에 없는 것이다.

 

가까운 사람들이 '저게 진짜 철도원'의 모습이라고 칭송한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워라밸을 중요시하는 시대가 아니더라도 시골역장의 지나치게 경직된 직업의식은 현대인이 공감하기 힘들 수도 있다.

 

 

 

 

그럼에도 가족에 대한 할아버지의 무뚝뚝하지만 애틋한 사랑은 많은 울림을 주며, 누구나 가진 인생의 회한을 일하는 로봇처럼 살아온 노 역장의 관점에서 잘 그려냈다. 좋아하는 일이나, 성공을 위해, 먹고살기 위해 인생에서 많은 것을 포기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으니까.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철도의 공공성과 철도종사자의 사명은 다른 직업에 비해 특수하다. 역장의 생애가 프로의식과 헌신, 가족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으로 누군가의 기억 속에 남아있다면 그걸로도 충분하다.

 

거기다 결정적으로 눈밭을 가로지르는 디젤동차의 그림같은 모습은 클로징 크레딧 끝까지 지켜보게 만드는 마력을 지닌다.

 

 

주연인 코바야시 넨지(센지 역)의 이름이 엔딩크레딧에서 한참 뒤 엑스트라들까지 지나고 나서야 등장하는데, 어떤 의미일지...

 

 

 

 

비둘기호와 통일호의 추억

 

90년대 주말 고향역 오전 11시경의 비둘기호는 매번 오던 기관차+객차가 아니라 영화에 나온 디젤동차가 한 번씩 편성되었는데, 그 독특한 소리와 진동이 좋아서 유독 그 시간대에 타자고 떼를 쓰기도 했다.

 

 

디젤동차 내부

 

 

도장이 찍힌 작은 차표를 손에 쥐고, 양손을 집게로 잡고 연 창문에서 불어오는 포근한 바람과 '타당 타당' 이음매 소리를 자장가처럼 들려주며 평야를 가로지르는 완행열차의 매력이 앞으로 한국에선 재현될 일이 없다는 사실이 먹어가는 나이만큼 서글프다.

 

할머니 집의 시골역도 폐선, 철거되고 통근열차마저 사라진 지금은 어느덧 가슴에 사무칠 정도랄까. 문득 기차가 생각나서 꺼낸 DVD를 보며 그 시절 추억이 떠올라 먹먹한 기분을 빼놓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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