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트 배경만 보여줘도 해당 씬의 대사를 다 읊을 수 있을 정도로 주조연은 말할 필요도 없고 단역까지 단어 하나하나가 감칠맛 나는 명대사의 집대성인 작품 "타짜"는 지금까지 백번은 넘게 본 것 같다. 저렇게 무릎을 탁 치는 기가 막힌 대사를 어떻게 생각해 냈을까. 원작 만화를 누가 이렇게 180도 틀어서 각색을 잘할 수 있을까.
실망스러운 결과물의 타짜 속편들은 많은 생각을 갖게 했고, 차라리 감독이 스타워즈처럼 프리퀄이나 주요 인물들의 스핀오프를 만들었으면 하는 생각이 드는 와중에 이대로 한 편으로 끝내기 아쉬운 캐릭터들이 머릿속에 맴돌았다.
뒤늦게 유튜브의 힘으로 발굴된 순정의 남자 '곽철용' 외에도 '아귀', '평경장', '고광렬', 심지어 아주 짧게 등장했지만 주연급 인지도가 있는 '너구리'까지 하나하나가 주인공으로 내세워도 될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들이 즐비하다. 그중 늘 눈에 밟히는 인물은 실질적으로 극을 이끌어간, 김혜수의 역작 "정마담"이다.
그 매력에 탄성이 나오는 위의 장면을 보면 왠지 원색 옷을 입은 "조커"의 계단 씬이 연상될 만큼 강렬하다. 더불어서 정마담도 "조커"처럼 그 기원을 다룬 하나의 독립적인 이야기가 될 수 있을 것 같다는 확신이 들기도 한다. 타짜에서는 정마담과 평경장의 관계와 과거에 관한 떡밥을 여러 번 대놓고 뿌리며 무언가를 암시했다.
"평경장, 내가 그 인간 때문에 이 길로 들었어"
이대를 다니던 요조숙녀 정마담이 운명처럼 평경장을 만나 점점 "예쁜 칼"로 흑화했다는 설정은 마치 다스베이더의 과거처럼 호기심을 극대화한다. 고니가 평경장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그녀는 과거를 떠올리기 싫다는 듯, 지겨운 그의 그늘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반응을 보인다.
일부러 평경장이 싫어하는 방법으로 그를 자극하고, 죽음의 복수까지 하는 것은 내가 이만큼 컸는데 무시당하고 뺨을 맞았다는 것만으로는 개연성이 너무나 부족한, 근원적인 갈증을 불러일으킨다.
또, 팜므파탈 정마담은 호구를 설계할 때 완전히 변신해서 마치 순진한 90년대 여대생처럼 코디하는데, 이마저 그녀의 과거를 떠올리게 한다.
어쩌다 도박에 빠졌다가 거액의 빚을 지고, 돈 때문에 삶과 죽음의 문턱에서 평경장에게 팔려가 도움 아닌 도움을 받아 각성하고 전문 설계자로 변신하는 과정, 그리고 도박장 문을 열고 들어오는 매혹적인 정마담의 화려한 피날레까지, 마치 스타워즈 프리퀄에서 아나킨이 다스베이더 가면을 쓰고 재탄생하던 장면처럼 눈에 아른거린다.
타짜(2006년)와 타짜:신의 손(2014년) 사이에는 무려 8년의 갭이 있었다. 정마담을 완성한 김혜수 배우가 어린 역할까지 맡기에는 지금은 세월이 너무나 흘러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저 기간 사이에 제작했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그렇다고 다른 여배우가 딱히 떠오르지도 않아 정마담 스핀오프는 결정적인 별의 순간이 한참 지나서 요원한 것 같아 보이기도 하다.
"고니를 아냐고요? 내가 아는 타짜 중에 최고였어요"
영화는 마치 연극처럼 정마담의 방백으로 시작하고 끝나는데, 자세히 보면 누군가 앞에 앉아있다. 취조하는 분위기가 아닐뿐더러, 그 대상이 그저 관객은 아닐 것 같다는 생각과 함께 그녀가 설계자 생활을 그만두고 다르게 성공해서 자서전을 쓰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상상도 해본다. 극 사이마다 등장하는 지친 그녀의 혼잣말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있기 때문이다.
타짜의 세 번째 시리즈 '원 아이드 잭'은 원작 중에 가장 영화화하기 적합한 무협지 같은 성장 스토리였는데, 좋은 배를 산으로 보내버린 듯한 역량의 한계가 많이 드러났고 그래서 너무 아쉽다. 역시나 재밌게 본 원작 만화 4편인 "벨제붑의 노래"나, 또는 만에 하나 "정마담"같은 스핀오프가 제작될 수 있다면 최동훈 감독이 다시 메가폰을 잡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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