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요한 겨울 산의 묘미와 함께
예상 못한 공포의 순간도
포항의 행정구역은 생김새도 독특하고 꽤 넓은 편인데, 특히 청송과 맞닿은 죽장면은 문명과 동떨어진 세상처럼 겹겹이 산에 숨어있어 두메산골이라는 이름이 어울리는 오지이다.
현재 직선화 공사 중이긴 하지만 아직도 2차선 도로로 고개를 여러 차례 넘어야 하며, 흔한 편의점도 찾아볼 수 없고, 버스도 시간대를 모르면 타기 힘들다.
등산 앱 상에 근교 모든 산의 GPS 배지를 획득하겠다는 일념으로 발견한 독특한 이름의 진늪산과 수석봉은 아주 가끔씩 산악회를 제외하고는 사람의 발걸음이 거의 없는 곳이라 일단 등로 찾기부터 힘들다.
앱은 물론 산악인 블로그에서 찾아봐도 수년 전의 것이고, 길이 없어 숲을 헤치고 가야 해서 체력소모가 배로 들고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다는 내용이 주를 이루었다.
봄 여름이 되면 수풀이 가득 차서 더욱 힘들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구글 어스와 카카오맵의 로드뷰를 통해 적당한 들머리를 찾았고, 능선까지만 올라가면 수월할 것 같아 서둘렀다.
역시나 시작하자마자 길이 없었고 경사가 가팔라서 애를 먹었지만, 등로 없는 비탈을 몇 번 올라본 자신감으로 무장하고 능선까지 오르고 나니 진늪산까지는 금방이다.
계속해서 등로는 안 보이지만 나무 사이는 충분히 널찍하고 홀로 조용히 숲 내음을 맡으며 호젓한 기분을 만끽할 수 있다.
고도가 높아지자 눈이 발목까지 쌓여갔는데, 마치 소금처럼 마른 눈이라 걷기에는 큰 무리가 없어서 또한 다행이었다. 오히려 산의 적막을 사각사각 눈 밟는 소리로 가르며 지나가니 그 순간만큼은 행복한 산행 그 자체였다.
평소에 눈길 하산은 쌓인 낙엽과 진흙으로 미끄러워서 엉덩방아를 찧기 일쑤인데, 소금같은 눈이 오히려 미끄럼방지에 도움을 주었다.
한편, 등산 내내 산짐승 발자국이 있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넘기며 자연과 함께 걷는다는 착각에 빠졌는데, 이것이 나중에 소름처럼 다가올 줄은 몰랐다.
특히 이상한 것이 내가 지나온 발자국 위로 아까 본 그 짐승의 발자국이 다시 나있었다는 것이다. 내 뒤를 쫓아온 것 같아 약간 께름칙한 생각을 하며 하산하던 중에 멀리서 개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주변엔 동네가 없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익숙한 사냥개 소리가 점점 가까이 다가와 순간 오금을 저리며 비탈 밑 나무 사이에 얼른 숨었다.
두 발로 서면 내 키는 될만한 커다란 개가 나를 추적하는 건지 왔다 갔다 하더니 다시 산을 올라가는 모습을 한참 숨죽여 지켜봤다. 아까 그건 들개 발자국이었다.
사람도 먹을 것도 없는 겨울 해발 800미터 눈 쌓인 곳에 들개가 웬 말인가. 등줄기의 식은땀으로 추위도 잊은 채 속으로 '살려달라'라고 외치며 헐레벌떡 내려가야만 했다.
오지에서의 홀로 산행은 이래서 무섭다. 사람이 안 다니므로 영역 침범이라 여기며, 일단 쪽수가 있으면 짐승도 물러나는데 혼자라면 만만히 보기도 쉽다. 특히 들개는 무리를 잘 짓고 공격성향이 강해서 외진 곳에서는 공포의 대상이다.
지나고 보니 멧돼지 퇴치용으로 누군가 산에 풀어놓은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도 멧돼지를 만났는데, 들개까지 만나고 나서야 서둘러 곰퇴치 스프레이를 구매했다. 맡아보니 거의 화생방 수준으로 독한데, 부디 쓸 일이 없길 바란다.
※ 산행 개조심 정보
포항 죽장면 진늪산~수석봉 일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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