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운의 수작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 금강산관광과 남북정상회담을 거치며 화해무드로 가면서 영화계에서도 쉬리, 공동경비구역JSA와 같이 남북관계를 소재로 한 작품들이 줄을 이었다. 영화 이중간첩도 그러한 시류에 편승하여 남북 간의 간첩, 방첩 활동에 대한 디테일을 살린 수작으로 개봉했지만, 당시 흥행한 경쟁작에 비해 다소 무거운 소재와 여주인공의 발연기까지 논란이 되면서 '2주간첩'이라는 불명예와 함께 비디오 가게로 직행해버린 비운의 작품이다.
본작의 실패는 90년대 대체불가의 '스페셜 원'이었던 한석규가 2000년대에 본격적으로 내리막길을 걸은 신호탄이 되기도 하였다. 유명세와 개런티에 비해 늘 연기력 논란을 달고 있던 고소영 또한 이 작품 이후로 톱 여배우로서의 지위는 사라졌다. 그 시기는 멀티플렉스가 급격히 늘어났고 장르의 다양화와 함께 연기자의 풀이 커져서 90년대 스타가 가진 절대적 입지가 좁아지는 것이 숙명이기는 했다.
정윤희 한 번 보러 내려왔습니다
엘리트 출신 스파이 특성을 살려 행동과 대사들에 재치가 많이 녹아있으며, 멀리서 보면 잔잔한 서사로 흘러가는 듯 하지만 외줄타기하는 이중간첩의 긴장의 끈이 극 전반에 걸쳐 팽팽하게 느껴진다.
라디오 방송을 통해 지령을 전달받고, 고정간첩과의 자연스러운 접선에 대한 묘사 등의 세밀한 완성도는 남북 간 첩보물에서 좀처럼 보기 힘든 현실적인 명장면들을 탄생시켰다.
최후 씬에 대한 논란
마지막 장면에서 의외로 다수의 관객들이 누가 사주했는지 모르겠다거나, 북한이 배후라는 반응을 했다. 하지만 흑인 청년은 두음법칙이 들어가는 남한식으로 '임'병호라고 정확하게 발음하며 대놓고 힌트를 주었다.
즉, 남한에서 사주한 것이고, 숨어서 죽은 듯이 살고 있는 림병호(한석규)를 브라질까지 추적해서 복수할 만한 사람은 그에게 농락당하며 일생의 정보기관 커리어를 망치게 된 1명밖에 없다.
그리고 수년 후, 드라마 아이리스에서 이중간첩 최후반 플롯을 빼다 박은 모습으로 마무리했는데, 당시에 개인적으로는 표절이라고 받아들였다. 오마주는 주로 영화사에 남을 명작에 대한 존경의 의미로 인용하는데, 본작은 흥행실패로 거의 묻혀버렸는데 이렇게 갖다 쓰면 오마주라고 받아들일 사람도 별로 없기 때문이다.
또, 진짜 오마주라면 고소영이 맨발로 하늘거리는 것처럼 상징적인 컷이 하나라도 담겼어야 하지만, 해당 플롯을 통째로 레퍼런스 해놓고는 마치 유사성을 피하려는 듯이 하나씩 변형한 흔적이 역력하다.
재평가
시대를 앞서가며 개봉 타이밍이 좋지 않았다고 볼 수밖에 없는 '이중간첩'의 안타까운 성적과 불명예는 재평가되어 만회할 수 있었으면 한다. 본작은 비교적 근래 개봉한 허무맹랑하고 유치한 설정의 남북 첩보영화들과는 감히 비교하기도 힘들 정도라고 본다.
'분단의 비극'이나 '동포애'에 치중하여 비현실적 설정과 오류로 떡칠한 남북관계를 다룬 자칭 첩보영화들에 비해 본작이 개연성과 완성도로는 단연 돋보이며, 이대로 묻혀 있기에는 두고 곱씹을 남을 장면들이 많은 보물같은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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