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 표준은 비즈니스의 생사가 갈리므로 각국과 기업이 사활을 건다. 서로 자신들의 제품이 국제적 표준으로 정해지길 원하며, 기업들 간에 무리를 지어 세를 키우는 합종연횡도 흔한 일이다.
한국에서 잘 알려진 국제 표준 규격에 대한 전쟁은 2000년대 삼성, 소니, 필립스 등 다국적기업의 블루레이 진영과 도시바가 주축이었던 HD-DVD 간의 치킨게임이다. HD-DVD가 먼저 출시되었고 기존 기기와의 호환성 등을 감안하여 초기에는 상당히 우위를 선점하는 듯했지만, 상대적으로 적은 용량과 그로 인해 부족해질 수밖에 없는 화질, 할리우드 콘텐츠 기업의 외면으로 이어지는 연쇄작용으로 블루레이에 참패하고 도태되었다.
사실 국제적인 표준 규격, 즉 공식 포맷은 HD-DVD였으나, 상대적으로 우월한 성능으로 평가를 받은 블루레이가 시장을 잠식함으로써 승자가 되자 사실상의 표준이 뒤바뀐 것이다.
더 많은 사용자들로 인한 경로의존성에 기반해 표준이 된 것들은 MP3, QWERTY 키보드, USB, HDMI 단자, SD카드 등 일상 속 제품에서 흔히 찾을 수 있다. 무인멀티콥터(드론)의 조종 방식 또한 세계시장에서 절대적인 점유율을 자랑하는 DJI사에서 MODE 2를 채택함으로써 마치 표준처럼 자리 잡았다.
표준은 누군가에 의해 정해지기도 하지만, 우월한 기술력이나 가격, 편의성, 익숙함 등으로 자연스럽게 선택되는 것임을 잘 나타내준다. 아무리 표준을 정해본 들, 소비자의 선택을 받지 못하면 도태되는 것이다.
이러한 경쟁은 산업혁명 이후 역사적으로 이어져왔으며 19세기 에디슨의 직류와 테슬라의 교류 간의 전류 전쟁이 대표적이다.
교류전기의 실용화를 선보인 웨스팅하우스와, 직류로 시장을 장악하고 있던 제너럴일렉트릭은 사실상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었다. 그러나 교류 설비의 편의성과 가성비로 독점 기업도 완패할 수 있다는 대표적인 선례를 남겼다.
교류 발전기는 직류 발전기보다 구조가 간단하고 대형화하기 쉬우며 저렴하고, 변압기로 쉽게 전압을 바꿀 수 있다. 즉, 직류에 비해 송전 효율이 매우 좋고 싸다는 것이며, 이는 전기 보급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발전 및 송전 시스템에서 보편적인 표준으로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이렇게 에디슨의 완패로 끝나며 100년 넘게 규모의 경제로 교류가 전력 공급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지만, 근래에는 고압직류송전기술(HVDC)이 나오면서 조금씩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초기 투자비용은 크지만, 초고압 송전 시 교류에 비해 전류량 손실이 적어 에너지 효율이 높고, 계통 연계가 용이해서 차세대 송전방식으로 직류가 다시 채택되기 시작한 것이다.
풍력, 태양력 등 재생에너지가 각광받자 유럽에서는 점차 송전망을 HVDC로 전환하는 추세이며, 한국에서는 제주도가 대표적인데 세계자연유산 지정으로 친환경 전력생산이 위주인 제주에 안정적 전력 공급을 위해 육지에서 제주로 연결되는 계통은 HVDC가 채택되어 부족한 전력을 상시 공급하는 시스템을 갖추었다. HD현대일렉트릭은 2023년 4월 세계최초로 1MW급 빌딩용 직류배전 설비를 상용화하기도 했다.
전기의자가 사형집행 방식으로 쓰이자 교류가 저렇게 위험하다고 치졸한 뒷 공작과 선동까지 동원하며 이기고 싶어 했던 고집의 에디슨으로서는 “이제 내 말이 맞다”라고 할 법 한 세상으로 다시 변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절대적인 시장 장악력을 갖고 있어도 기술 발전에 따라 언제든지 표준은 바뀔 수 있고 지배력을 믿고 안주하다가는 그 누구라도 허무하게 도태될 수도 있다는 점, 그리고 기술 표준에 있어서는 영원한 승자도 없고 패자도 없다는 점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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