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20세기야
하인이 주인집 아들과 염문이 무성하자 다들 세상이 변했다며 저렇게 말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전후 사브리나의 미국은 아직도 백마 탄 왕자님에 의한 신분 차이, 고부갈등과 막장스러운 뒷 공작이 주요 소재인 21세기 한국보다 개방적이고 리버럴하고 평등해 보였다.
오드리 헵번은 쉽게 사랑에 빠져버리는 고삐 풀린 망아지같은 22살 아가씨를 너무 잘 연기 또는 상징했고, 연애에 무관심한 노총각 재벌도 녹여버리는 마력의 소유자였다.
로맨틱 코미디의 시조급에 있는 본작에서 그녀의 세기를 초월한 아름다움은 흑백 영상을 넘어 침투하며, 50년대 작품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패션의 완성을 선보인다.
모든 드레스들이 화려했지만 단연 눈에 띄었던 것은 험프리 보가트의 사무실을 찾아갔을 때의 장면이다. 영화에서 그녀는 이런 꼴로 어떻게 데이트를 즐기냐고 했지만, 지금은 보편화된 사브리나 팬츠와 플랫(슈즈)이라 불리는 조합의 시작이 본작라는 점에서 혁명적이라 일컫고 싶다.
사브리나의 근황
1995년 헤리슨 포드 주연으로 배경을 현대로 옮겨 리메이크했지만, 진부한 소재라 별다른 반향 없이 묻혔다. 원작 연극인 Sabrina Fair는 비교적 최근에도 무대가 열렸는데, 또 PC가 뭔지 사브리나도 결국 흑인이 되었다...
https://www.fords.org/performances/past-productions/sabrina-fair/
북유럽의 인어공주도 흑인이 되고, 오드리 헵번의 사브리나도 체형도 생김새도 정반대인 사람이라니, 꼭 그래야만 하나. 일개 로맨스 작품에 왜 정치성이 계속 개입되어야만 하는지, 강압적인 사회분위기로 연극 출연자의 인종까지 특정하는 것이 오히려 차별이며 표현의 자유를 심각하게 침해한다. 현실적 개연성에 대해서도 아예 솔직히 말하자면, 1950년대 워커홀릭 재벌은 저 연극 무대 외모의 사브리나와는 그 어떤 일탈도 하지 않을 것이라 본다.
사브리나는 아름다우면 안 되는가? 아니, 누가 봐도 아름다워야 한다. 별 깊이 없는 로코물이지만 만인의 연인이자 불멸의 미모를 전하는 오드리 헵번 때문에 유명해졌고, 그래서 지금도 빛바랜 영상을 세계인이 꾸준히 다시 찾아보는 것 아닌가.
21세기는 솔직하지 못한 정치적 가식과 위선 때문에 문화 예술의 시대상과 역사성을 부정하며 원작의 정체성까지 훼손하는 것 같아서 이런 상황을 마주할 때마다 그냥 어처구니가 없다. 세월을 역행하며 모든 분야에서 '꼰대' 역할을 하고 있는 PC에게 본작의 대사를 빌려 말하고 싶다.
지금은 21세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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