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뷰

리갈하이와 현실의 언더도그마

moonstyle 2022. 9. 1.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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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후지TV의 '리갈 하이(Legal High)'가 첫 방영한 지 올해로 10주년이 되었다. 시즌1(2012)과 시즌2(2013), 스페셜1, 2까지 모두 챙겨보며, 성장한 여주인공의 모습이 기대되는 시즌3를 기다렸지만 캐스팅 문제 등으로 번번이 불발되었다. 핵심 주연이 긍정적인 언급을 하기도 했고 2021년에는 제작 예정이라는 뉴스까지 나왔지만 곧 삭제된 것으로 봐서 현실적인 문제가 산재해 있었고 이제는 아예 시기를 놓친 것으로 보인다.

 

 

리갈하이 시즌1, 시즌2 포스터 (애정씬이 연상되지만, 본작의 내용과는 별 관련이 없다)



리갈하이는 주연 사카이 마사토가 "코미카도는 누구보다 어른스러운 남자"라고 했을 정도로, 가벼운 코미디로 접근하게 되지만 속은 매우 깊은 작품이다. 유치하고 독선적인 개개인의 정의감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되고 법치주의에 대한 확고한 철학이 녹아있어서, 자신의 감정, 정의를 남에게 강요하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그 감회가 남달랐다.

 

 

 

약자는 과연 선(善)한가

본 작품은 '언더도그마' 현상을 신랄하게 꼬집고 있다. 악덕 경영자와 노동자도, 살인 혐의의 용의자와 그를 비난하는 사람들도 각자의 관념과 정의관과 입장에 따라 대립하는 것이지 누구도 함부로 선악을 재단할 수 없다는 자세를 견지한다. 약자는 힘이 없으니까 강자에게 핍박받을 것이기 때문에 피해자라고 단정하는 통념이나, 흉악한 범죄에 경악한 모든 사람들이 용의자를 손가락질하는 행위 자체마저도 고정관념이라는 것이다.

 

 

 

정의를 찾기 위해 변호사가 되었다는 마유즈미를 꾸짖는 코미카도

 

 

변호사는 실체적 진실을 탐구하는 정의의 사도가 아니라 누구나 선임할 수 있는 의뢰인의 대리인일 뿐이다. 리갈하이의 주역 코미카도 켄스케는 의뢰인의 효익만을 추구하는 변호사의 본분 외에는 섣불리 측은지심이나 대중과 영합한 정의감 같은 감정이입을 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처음부터 끝까지 한결같이 설파, 관철시키고 있다.

 

"우리는 신이 아닙니다. 저를 포함한 모든 인간은 어리석고 감정적인, 분명히도 보잘것없는 생물입니다. 그런 인간이 다른 인간을 심판할 수 있을까요? 아니오,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인간을 대신해서 법이 심판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의심스럽거나 미운 사람이라도 일체의 감정을 배제하고 법과 증거만으로 심판하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 인류가 길고 긴 역사를 통해 얻게 된 법치국가라는 소중한 재산입니다."

- 리갈하이 시즌1 11화, 코미카도 켄스케의 최종 변론 中

 

인간의 관심법은 불가능하므로 이미 선악이라는 답을 정해놓고 접근하는 방식은 치명적인 오류를 갖고 있다. 2010년대 들어 다수의 감정적 판단과 행동만이 진실이라고 강요하며 원칙이 사라지고 피해자 또는 피해호소인이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것에 피로감을 느끼기 시작한 사람들이 늘어났다. 이렇게 언더도그마에 빠진 현실 정치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는 분위기가 커진 가운데 본 작품이 시원하게 등을 긁어주는 상상의 대체재가 된 것이다.

감성 떼법은 법치주의에 완벽히 반하는 것이고 사법부는 근본적인 원칙에서 벗어나는 판결을 내리지 않는다는 점에 대해 본작에서는 확신을 갖고 있다. 또한 코미카도는 이러한 시스템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판사들의 성향도 꿰뚫고 있으므로 100%의 승률이 가능할 수 있다. 그러나 배경이 한국이 되고 그 현실을 반영한다면 코미카도의 승률은 녹록지 않을 것이다.

 

 

일본 드라마 리갈하이와 한국 법치주의의 현실

일본의 사회 분위기가 대단히 보수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묵시적 청탁이나 성인지 감수성 따위를 들먹이며 여론과 감정에 의지한 판결을 내리는 한국보다는 법치의 근간이 되는 원칙이 잘 지켜지고 있는 면이 대중적인 매체를 통해 함축되어 나타났다고 본다.

 

 

여러 커뮤니티에서 화제가 된 '민의' 씬 - 민의(여론)에 의해 판결이 좌지우지되는 현상을 짚었는데, 공교롭게도 한국에서 화제가 된 당시는 국정농단사태가 각계의 탄핵과 실형으로 마무리되고 있을 때였다. 돌팔매질과 멍석말이를 하는 과정을 보고 뭔가 이상하다고 느낀 사람들이 몇년 전의 드라마 장면을 꺼내온 것이다.

 

 

한국 사법체계의 현실은 인사권을 가진 정권에 의해 갈대처럼 좌지우지되며, 특정 이념성향을 가진 하나회 수준의 사조직이 자랑스럽게 실체를 드러내도 전혀 정치적 중립성 위반에 대한 제약이 없고 정권과 결탁해 핵심 요직을 차지하는데도 문제가 되지 않는다.

사회적 이슈에 따라 원칙 따위 없는 고무줄 같은 판결이 난립하는 데는 이러한 구조적 문제점들이 중추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무죄추정과 일사부재리 등 대다수가 알고 있는 아주 기초적인 원칙조차 묵살해버리며 법치의 근간을 흔들고 있는 한국의 사법체계는 미숙아에 가깝다.

약자를 돕는 것만이 정의라고 부르짖는 리갈하이 시즌1의 마유즈미는 냉철한 이성보다 순간 자신의 감정을 우선시하는 미숙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그런 그녀도 코미카도에 의한 실전 훈련 끝에 진보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지만, 민주주의가 뿌리내린 지 80년을 맞이하고 있는 한국이라는 국가 체계의 성숙한 면은 여전히 잠식되고 퇴보하고 있다.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면 증거가 확실치 않아도 시위의 대상은 여론에 의한 괘씸죄가 적용되며, 민의를 등에 업은 세력은 삼권분립이 무색하게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한다. 여성은 무조건 약자라는 전근대적이고 편협한 성차별적 시각만으로 인류 역사의 토대로 완성된 형사소송의 대원칙을 단번에 파괴하였다. 이런 방식으로 심층적 연구 및 실험과 합의 없이 시류에 따라 법에 여론과 감정을 계속해서 주입하려 하며, 심지어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시도가 긍정적으로 평가받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감정적이고도 원칙없는 한국인의 대체적인 의식 수준을 본작과 연관해서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증거 중에 하나는 한국에서 본작을 리메이크한 결과물이다.

 

 

한국판 리갈하이

리메이크는 잘해야 본전이라는 말이 있듯이 창작만큼 어려운 작업이다. 다만 소재 선정 과정을 쉽게 넘길 수 있고 원작을 프로토타입으로 삼아 개선된, 또는 색다른 결과물을 만들 수 있다는 것에서 고되지만 즐거운 작업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그 전제는 리메이크 작가의 원작에 대한 철저한 이해도를 바탕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피해자의 목소리가 증거입니다'라고 외치는 J방송사에서 리메이크하면 100% 원작의 기획의도에 정면으로 배치되는 드라마가 될 것이라는 방송 전 다수의 우려가 있었는데 뚜껑을 열어보니 150%, 200% 이상이었다. 말 그대로 속칭 '메갈하이'였다.

 

신참 변호사에게 커피 심부름을 시키고 그걸 또 '직접 타 드세요' 하며 받아치는 장면에서는 헛웃음이 나오는데, 법을 주제로 한 드라마에서 변호사, 로펌에 대한 기본적인 취재도 안 한 것 같다고 느껴진다. 성폭행 미수를 당한 후 우리의 캔디는 주먹으로 혼내주고, 뜬금없이 알파걸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복싱을 하며, 일반인이 검사를 커피숍에 불러내서 한국에서 '그 사상' 가진 분들이 하는 말들을 그대로 하며 협박까지 한다. '법정 드라마'에서 피해의식에 가득 찬 망상을 구겨 넣어 자신의 작품을 시궁창으로 만드는 것을 보는 원작자의 마음은 과연 어떨까.

 

 

9살 아이가 리갈하이 원작을 본다면 익살스러운 사카이 마사토의 연기와 기관총처럼 쏘아대는 말빨에만 주목하고 말 것이다.

 

 

한국 리메이크판에서는 "어린이가 원작을 보고 만들었을 때 이렇겠구나" 하는 느낌을 받는다. 원작을 매우 1차원적으로 해석했다는 것과, 진부하고 유치한 유머 코드는 눈살을 찌푸리게 하며, 메타포와 철학적 이해도가 0에 수렴하는 나라 망신 수준의 영상물이 되어버렸다.

 

왜 이런 수준의 드라마가 유명 연예인을 캐스팅하여 황금시간대에 간판을 떳떳이 들고 나오는지, 리메이크가 이렇게 저질이 되는지를 생각해보면 '한국 민중에게는 이것이 정답이기 때문에'라는 결론을 '섣불리' 내고 싶다. 잘 생기고 재벌 2세인 본부장님이 신데렐라를 만나 '꽁냥'대는 것으로 끝나는 드라마가 시청률 1위 먹고 작품성이 어쩌고 하는 판이 곧 TV를 달고 사는 시민의식 수준이고 교육 수준의 단면이며, 정부에서 드라마 속 황당무계한 성차별 내용을 지적하고 아이돌 얼굴 패션 품평하는, 어린아이 생떼가 지배하는 나라의 수준이라고 본다.

 

한국에서는 마이클 센델의 '정의란 무엇인가'가 불티나게 팔렸지만, 패션 소품으로 산 것인지 저자의 의도를 이해한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자신이 들고 있는 촛불이 과연 정의인가라고는 절대 고민하지 않았다. 여론재판, 인민재판 앞에서 진지한 성찰은 그 누구도 하지 않았거나 못했고, 반론은 곧 매장이었다. 광우병 사태는 언더도그마에 잠식된 광란의 파티였음을 이미 까마득히 잊고 있으며 정권이 바뀔 때마다 누군가에 의해 반정부 행사는 반복된다.

 

떼쓰면 다 들어주는 나라. 가만있으면 호구가 되는 나라. 내 감정, 내 사상을 남에게 강요하는 나라. 파시즘이 지배하는 나라. 여론이 법 위에 있는 유사국가에서 원작 리갈 하이가 주는 메시지는 공허하다.

 

 

 

정치적 올바름(PC)에서 나타나는 언더도그마

PC주의는 대개 하찮은 선민의식에서 시작한다. 그들은 편견을 문제 삼으며, 더 나아가 그럴 의도가 없는 상대에게도 편견이라고 재단하며 또 다른 편견을 만들어내고 있다. 쉽게 말해, 편협한 본인의 도덕적 잣대로 착한 척해서 우월해지고 싶은 마음이 누구보다 앞선 성급한 결과물이다. 자신이 만들어낸 사려 깊지 않은 기준에 따라 강자와 약자를 정하고 타인에게 희생을 강요하는 이차 폭력을 행사하는 것이다.

 

나는 약자들을 이만큼 생각하는데, 너는 약자를 배려하지 않는구나

 

 

또한 PC에 지나치게 매몰된 나머지 북유럽이 배경인 동화에 흑인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키기까지 한다. 개연성이 문제인 것이지 피부색의 문제가 아님에도 세계 최대 영화제작사가 정치적 올바름의 언더도그마에 앞장서며 어린이에 대한 사상개조까지 침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BLACK LIVES MATTER 구호에 불을 지핀 조지 플로이드 사건에서도 희생자가 사건 당시에 마약에 취해있었고, 무장강도 행위를 밥먹듯이 해온 사실은 중요하지 않았고 그는 급자기 흑인 인권운동의 거룩한 상징이 되었다. 애초에 잘못된 진압 방법이 문제이며 인종문제와 큰 관련이 없는 사건인데도 흑인=약자, 경찰=인종차별하는 공권력으로 낙인하여 선동해댔고, 흑인들의 폭동이 무서워서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미국 법정마저 그들의 분노를 잠재우려고 경찰들에게 과실치사가 아닌 살인혐의를 씌워 사회적으로 매장시켰다. 세계 민주주의 리더를 자처하는 미국 또한 떼법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는 상징적인 모습이었다.

 

 

조지 플로이드의 희생이 성소수자와 무슨 관계가 있는지 모르겠다

 

 

사회적 약자라는 흑인들이 더 약자인 동양인들을 대하는 모습을 똑똑히 보았고, 흑인들 또한 인종차별의 가해자가 되는 것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필자 또한 채팅 앱에서 만난 멕시코인에게 진화가 덜 된 몽골로이드는 꺼지라는 말까지 들었다. 인종차별 문제는 흑인 만이 특권적 피해자가 아니라 백인 흑인 황인 소수민족을 불문하는 범 세계적인 공통분모가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언더도그마 현상을 주도하는 흑인들만이 마틴 루터 킹 시절의 피해의식에서 머물러 있다.

 

서구권에서 저소득층 흑인이나 이민자의 범죄율이 높은 것은 명백한 사실이며 선량한 시민의 권리를 침해할 가능성이 높은데 이 사실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무리를 지어 인종차별이라고 선을 그어버리고 묵살하고 심지어 폭력까지 행사하는 것도 언더도그마에 의한 폐해의 일종이다. 빈부격차를 유발하여 흑인들을 우범지대로 전락시킨 백인 기득권층에 대한 이분법적 분노가 범죄행위로 이어지는 것으로 정당화될 수는 없다.

 

 

 

반(反) 언더도그마도 문제가 있지 않을까

언더도그마의 맹점을 확실히 각인시켜 전장에서 승리를 거둔 경우도 있다. 민간인 구역 무차별 폭격에 대한 도덕적인 문제와 폭격기 조종사들의 심리적 부담을 덜기 위해 2차 대전의 명장 커티스 르메이는 도쿄대공습 당시 일본의 가내수공업 형태의 산업구조를 지적하며 "선량한 민간인은 없다"라고 못을 박았다. 황국신민들은 총을 들지 않았지만 전쟁과 무관한 민간인이 아니라 전쟁 지속을 위해 물자를 조달하는 공급책이자 임무수행자였던 것이다.

 

도덕적 딜레마를 극복하고 성공한 르메이나 본작의 코미카도의 행동도 자칫 반대를 위한 반대에 이용될 수 있는 가능성이 존재한다. 즉, 언더도그마에 대한 반발로 행한 행위가 약자의 희생에 대한 도덕적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쓰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위의 르메이의 폭격에서도 진짜 선량한 민간인이 더 많았을 수 있으며, 코미카도가 수임한 독특한 사건과 달리 사회에서는 통념 그대로 약자가 선한 경우도 충분히 많다.

 

 

이렇게 대놓고 인종차별하는 시절은 한참 지났고 지금은 차별행위를 했다가는 사회로부터 격리될 수도 있는 반면, 오히려 교조적인 PC주의가 시대를 역행하여 이런 차별방식을 거꾸로 답습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20세기에 인류는 인종차별과 인권침해로 인한 후유증을 앓고 사회적으로 처벌 수위가 높아져서 적어도 공식적으로는 차별문화가 상당히 희석되었고 과거의 흑백갈등같은 원초적인 차별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상이 되었다. 언더도그마의 반대급부로 인한 문제점이 현시대 심각하게 부각되기 시작한 언더도그마의 부작용을 상쇄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기에 이르렀다고 본다. 정치적 올바름의 문제점도 언더도그마 현상이 너무 과해서 선을 넘었다는 것에서 비롯한다.

 

 

단순 사실 전달도 혐오가 되어버린 세상

약자는 배려해야 하지만, 배려받는 것이 무한정 독점적 권리가 될 수는 없다. 작금의 현실은 약자를 참칭하는 것이 권리를 넘어 아예 정치 세력화, 무기가 되었다는 것이다. 언더도그마적 현상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 인종차별주의자, 성차별자, 혐오세력, 반인권주의자, 매국노, 친일파 등으로 낙인찍어버리는 세태는 광기에 가깝고, 일방통행만을 부르짖는 파시스트의 세상이 된 것 같아서 심히 유감이다.

지금 뉴스에서는 원숭이두창이 "주로" 동성 간의 성관계에 의해 전파된다는 "사실"조차 제대로 전달하지 못하고 있다. 성소수자에 의한 검열이 두려워 알아서 기는 것이다. 공중 보건에 대한 알 권리가 혐오라는 딱지를 붙여 은폐되는 현상이 민주주의 체제에서 과연 정상인가.

리갈하이가 명작의 반열에 있는 이유를 찾는다면, 이러한 전체주의적 광기에 대한 유쾌한 일침이 되어서 일 것이다. 가볍게 볼 수 있는 코믹 요소로 접근성을 높이면서 사려 깊고도 교양적인 내용을 환기시키는 것만으로도 오랫동안 그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고 본다. 다수의 감정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린치를 가하고 매장시켜버리는 야만과 반지성의 척결이 곧 시대적 명분이 될 날을 본작을 다시 감상하며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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