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울릉도는 왜 도동이 중심지일까

moonstyle 2022. 5. 11. 15: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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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 울릉도가 궁금해서 빠져있을 때, 울릉도의 입구인 도동이 굉장히 좁아보였고 고개너머 저동이 더 커보여서 왜 그럴까 궁금해하다가 지식인에 물어봤지만 '복붙'만 있을 뿐 별 유의미한 답변이 없어서 셀프로 조사해서 셀프로 답변달아서 채택했었다.

 

실제로 울릉군의 관문인 도동은 굉장히 좁고 답답한 느낌인데, 그에 비해 고개너머 옆동네 저동은 넓직하고 탁트였다. 억지로 구겨넣은 도동과 달리, 저동은 육지의 어항 느낌이고 아파트까지 있다. 울릉도의 개발이 매우 어려운 관계로 수많은 관광객이 첫밟을 내딛는 도동의 선착장 앞의 상가의 땅값은 한때 전국 최고를 자랑했었다.

 

도동항 (CC BY 사진출처) 저동항

 

지금이야 울릉도 곳곳에 안벽과 방파제가 완비되었지만 본격적으로 개척이 시작된 19세기~20세기초는 물론이거니와 그 이전 역사에서는 엄청난 해풍과 파도, 바위밖에 없는 해변에 상륙하기가 상당히 힘들었을 것이다. 특히 섬 전체 대부분의 해안이 절벽에 가까워 일정 규모 이상의 선박의 접안과 정박이 어려웠는데 오직 도동 지형의 경우 파도와 바람의 영향을 덜 받을 수 있는 자연 형성된 만(灣)이 포구 역할을 할 수 있었고, 결정적으로 배후지로 정착이 가능한 골짜기가 형성되어있어 입출입과 개발이 가장 용이했던 곳이라 거점이 될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구글 어스로 본 도동항> 울릉도 전체를 찾아봐도 방파제 도움없는 자연적인 포구와 부락을 이룰 수 있는 골짜기가 어우러진 곳은 도동 밖에 없다.

 

역사적으로는 일본과 밀접한 연관이 있는데, 조선인은 울릉도에서 육지와 담을 쌓고 농사를 지은 반면, 일본인은 수출과 어업을 주로 했다는 것이다. 19세기말 고종의 울릉도 개척령이 반포되기 전에는 조선 정부에서 공도(空島) 정책을 실시하였는데 그 사이 일본인들이 들어와서 벌목과 포획을 하면서 살고 있었고 도동지역은 제법 시가지의 모습까지 갖추고 '도방청'이라고 이름을 지었으며 지금 도동이라는 이름의 유래가 된다. 조선인은 화전 농사를 짓고 살았으며, 근대의 본격적인 울릉도 개척은 수출과 어업을 목적으로 한 일본인이 주가 되었다. 앞서 말한 지리적 장점으로 이전부터 어업으로 자리잡은 일본인 부락과 개화기 벌목 수출이 작용하여 자연스럽게 중심지가 된 것이다. 이는 조선시대 변방 어촌에 불과했던 부산이 오늘날 제2의 도시로 발전된 연유와 비슷하다.

 

나리분지 (CC BY 사진링크출처)


심지어 고종 시절 검찰사로 파견된 이규원도 울릉도를 둘러보고 처음엔 거점을 농업의 중심지인 나리분지 지역으로 정하고자 했다. 조선은 예로부터 상업과 뱃일을 천시했으므로 당시로서는 당연한 사고방식이 아닐까. 개척 이후 일제강점기에도 울릉도 인구는 조선인 1만1천200여명 일본인 480여명으로 여전히 조선인은 농사, 일본인은 수출과 어업이었다. 당시 울릉군수는 행정은 물론 지역 방위와 치안 등 업무를 총괄하는 막대한 권한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 부락인 도동은 더욱 울릉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다. 해방 이후 일본인들을 다 추방시켰지만 섬에는 도동만한 인프라가 있는 곳이 없었으며, 일본인들이 남기고 간 기반시설의 영향으로 오늘날의 각종 관공서가 있는 중심지로 계속 이어진 것이다.

요약하면, 인공적인 접안시설, 방파제를 구축할 수 없었던 시절에는 해풍의 영향을 그나마 덜 받고 자연적으로 형성된 포구로서의 물자의 수출입과 해안 정착에서는 울릉도에서는 도동이 이상적이었고, 그로인해 형성된 일본인 마을과 관청에 의해 중심지가 되었으며 그 인프라를 계승한 것이 오늘날의 울릉도 도동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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