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태조 왕건은 명백한 궁예의 후계자이다. 소련의 흐루쇼프가 신적인 존재로 군림했던 스탈린에 대해 격하운동을 벌였어도 그는 스탈린의 정통을 이은 사람이듯이, 왕건이 고려의 실질 창업자 궁예의 모든 유산을 물려받은 것을 부정할 수 없다. 궁예하면 빠지지 않는 승자 왕건의 기록에 의한 희생양이라는 일부의 주장에 대해서도 공감이 가는 이유가, 전임자에 대한 유언비어와 비방, 보복으로 얼룩지는 현대 정치판을 보더라도, 그 당시의 기록의 신빙성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점에 있다.
궁예는 여론을 등에 업고 권력을 잡는 과정과, 구중궁궐에서 변절하는 권력자의 극단적 전형을 보여주는 교과서적인 인물이라 극적 카타르시스를 유발하는데, 한편으로는 실존인물이 이렇게 짜맞춘듯이 시나리오처럼 전형적일 수 있을까 의심을 하게 된다. 신화처럼 서술하는 그 시대의 언어는 늘 다차원적으로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정권을 찬탈한 왕건 세력에게 있어서 궁예는 최대한 백성과 나라를 망쳐놓은 악마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막무가내로 비난을 하고 끌어내리기에도 문제가 왕건도 그 악마같은 궁예 밑에서 충성을 다해서 일했다는 점과 그를 배신했다는 것 때문에, 고려의 역사기록을 살펴보면 이 두 모순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는 것 같다는 인상이 많다. 고려사 초기는 이에 양보를 해서 정권을 잡기 전엔 성군이었는데, 왕위에 오르니까 너무 변해서 어쩔 수 없었다는 변명으로 끝난다.
미디어에서 대체로 왕건은 마치 정의의 사도이자 도덕적으로 완전무결한 영웅처럼 묘사하는데, 오히려 수십년이 지나도 궁예 캐릭터만 회자되는 것을 보면, 대중은 영웅 클리셰로 떡칠한 왕건에게 정서적 공감을 얻을 수 없다고 볼 수 있고, 여기에서 왕건 신화의 철저한 비현실성이 비춰진다.
고려 건국은 한국사의 유일한 군웅할거시대인 후삼국시대를 거쳐 이룩한 자주적 통일이라는 스포트라이트를 내세우지만 실제 태조 이후 고려가 나아간 방향은 안으로는 정권 쟁탈로 얼룩지고 밖으로는 끊임없이 외세의 침략을 받아 피폐한 백성들의 삶은 진일보하지 못한 채 제후국으로 전락하게 된다. 상생과 조화를 통해 통일을 이뤘던 태조의 국가 운영 비전에 비해 그 결과가 너무나 상반적이라는 점에서 볼 때, 사관의 평가와 기록을 차치하고 결과론적으로 왕건과 궁예의 차이는 후손에게 권력을 넘겨주었는지 남에게 빼앗겼는지 차이로 보아도 무방하다.
만주 고토를 회복하겠다는 고려의 꿈은 거란에게 내주었고 역사의 무대를 스스로 천리장성 안 한반도로 가두었으며 성장보다는 정권창출과 안정을 위해 국력을 소진하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자기합리화와 미화로 일관하는 왕건의 기록처럼, 악마가 된 궁예를 위해 기록에 드러나지 않는 변명을 해보면 신라에서 집권세력만 바뀌는 이런 편협한 통일보다 국력을 신장시켜 동아시아의 맹주였던 발해나 뒤를 이은 거란처럼 강대국으로 부흥하고자 했던 자신만의 비전과 시도가 있었지 않았을까 짐작해본다.
궁예의 정신상태
아무리 좋게 봐서 강성대국 실현을 위한 급진적인 정책을 펼치다가 정변으로 몰락해서 쓰여진 승자의 기록이라고 하더라도, 그의 미륵신앙에 대한 편집증과 권력에 대한 과대망상적 행태는 어떤 사료에서나 빠짐없이 등장한다. 그러나 현대의 눈으로 보았을때 궁예의 잔혹성과 엽기성은 혀를 내두르지만, 고대 전제왕권시절의 비인간성은 지역과 시대를 불문하고 나타난다는 점도 반영한다면, 타고난 식견과 군사적 능력으로 삼한통일을 목전에 두었던 그가 단순히 미쳐서 저질렀다고 보기에도 무리가 있다고 본다.
광기 그 자체로 기록된 집권 말기에도 궁예는 월경지인 나주정벌을 기획하여 제해권을 장악하는 탁월한 안목을 보여주었다. 후대의 추측으로 해상세력인 왕건이 제안해서 정벌했다는 각색이 이뤄지지만 전국시대에 더해 절대 왕권체제에서 대규모 상륙작전은 왕의 전략적 판단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하고, 후에 왕건이 나주를 견훤에게 뺏기고 수도 개성까지 기습당한 모습을 볼 때, 궁예 말년의 안목은 광인의 모습과는 괴리가 있다.
군사력은 곧 경제력에서 비롯한다는 동서고금의 진리를 보더라도 궁예는 당시 청해진으로 상징되는 서남해권의 중국-한반도-일본 해상 교역의 경제적 수혜를 정확히 알고 있었고, 이를 위해 적의 최후방 영토를 월경지로 삼는 기상천외한 전략을 과감히 시행했다고 봐야 할 것이다.
또한, 괜히 쓸데없는 자존심 내세우며 거란과의 관계를 악화시켜 결국 전국이 유린당한 결과를 낳게 한 왕건이나, 한물간 오월국과의 교류에 집착하며 인정받으려한 견훤처럼 시대착오적인 결정을 했던 두 인물과 달리, 궁예는 동북아의 신흥 강자 거란과의 국교에 호의적이었을 정도로 국제 정세에도 밝았다.
몰락 원인은 철원 천도
출중한 군사적 능력과 판단력을 바탕으로 여론선동, 거병에서 창업과 외교력까지 그토록 영리했던 궁예가 자신의 몰락에 결정타를 날린 철원 천도는 미스터리 그 자체라고 볼 수 있다. 다른 평가는 오류나 주관이 섞여 실제와 다를 수 있다고 해도 철원 천도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데, 삼척동자가 봐도 철원은 도읍지로서의 장점이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혹독한 날씨와 강수량, 너무나 얕고 좁아 지금도 래프팅이나 하는 한탄강의 유량과 불가능한 수운 교통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단순히 평야지대가 있어서 산간오지로 수도를 정하는 멍청한 인물이었나?', '역시 제정신이 아니었나?' 하는 의심이 들게 하는 이해할 수 없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아무리봐도 철원 신도시 건설은 출신이 불분명한 궁예의 정신적 고향이거나 미륵사상에 심취한 폭군의 개인적인 감정이 섞여있는 결정이 아닐까 유추만 할 뿐이다.
궁예의 비대칭전력
신라말기를 지배한 말세의식과 미륵사상은 궁예가 가진 권력의 핵심이었다. 당시의 관점에서는 불교 사상이 지배했고 핍박받은 피지배층이 군의 주 전력이라는 점에서 신라 조정에 대한 반감과 불국정토 미륵성전으로 정신무장된 병력은 한반도 중부를 순회하며 승전 가도를 달렸고 그 당시에 누구와도 견줄 수 없는 비대칭전력이 되었다. 이런 점에서 오늘날의 최빈국들이 사상통제와 핵과 미사일이라는 비대칭전력에 집착하는 것과 당시 궁예의 미륵사상 강화를 위한 철권통치는 그 동일선상에서 봐야 한다는 견해이다.
다시말해 자신의 성공 역사이자 주춧돌인 미륵군에 대한 궁예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전력강화가 곧 사상무장이었던 셈이다. 현생 미륵부처가 되어 경전을 쓰고, 야단법석을 열고, 반신라사상 주입과 측근에 대한 관심법까지 모든 것이 군권 장악과 당시 전쟁에 있어서 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사정에서 나온 수단이었다고 본다. 이런 신정적 전제정치라는 한국사 전무후무한 궁예의 정치 시스템은 세계사에서도 나치즘과 군국주의에서 그 아류로 재생하기도 했다.
고려시대 편찬된 삼국사기나, 조선시대에 편찬된 고려사를 보고 후삼국시대 왕건 미화와 폭군 궁예를 곧이곧대로 믿기는 힘들다. 어느 시대에서나 급진적인 사상은 무수한 피가 낭자한 반발을 낳기 마련이고, 광인의 칼춤인가, 비운의 혁명가인가에 대한 의견은 공존하지만, 중요한 것은 자칫 정의로운척 가식적으로 보일 수도 있는 평면적 인물인 왕건보다 다양한 극적 생애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궁예가 역사적 인물의 관찰과 평가에 있어 독특하고 흥미로운 모델이라는 점이다.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에 대해서는 앞으로 철원성의 발굴 작업과 더불어 태봉과 궁예에 대한 다각도의 조사와 연구가 이뤄졌으면 하는 바람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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