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세이

견훤의 한계와 결자해지

moonstyle 2022. 7. 19. 21: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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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개국한 나라를 자신이 공격하여 멸망시킨 전 세계 유일무이한 족적을 남긴 견훤은 말단의 맨손 무장에서 출발해서 순수 본인의 능력만으로 왕조까지 창업한 까닭에 역발산기개세의 패왕이 연상되는 선망적 캐릭터이다.

 

 

용장 견훤의 재림을 보여준 드라마 태조왕건 ⓒKBS

 

호남과 영남의 비옥한 지역을 토대로 한반도 최대 세력을 구축한 그가 배신에 배신을 거듭하는 전국시대의 가장 큰 희생양이 된 것은 억울해 보인다. 서라벌 침공 같은 외부적인 문제 외에는 딱히 내부적으로 폭정을 저지르지도 않았는데 믿었던 혈육과 신하들의 배신 때문에 평생을 바친 공든 탑을 스스로 무너뜨리는 참담함은 억장이 무너진다는 표현도 부족하다.

 

 

배신의 희생양 견훤

 

1. 아들(신검): 아버지인 자신을 폐위
2. 아버지(아자개): 적국(고려)으로 귀순
3. 신하(공직, 능환 등): 배신 및 반역
4. 손수 옹립해준 신라 경순왕: 곧장 단교하고 나라와 함께 통째로 고려에 투항
5. 전선 최후방 서남해 호족들: 고려와 내통하여 전향

 

원래 전국시대는 협잡과 배신이 판을 치지만 혼자서 이렇게 결정타를 맞은 굵직한 것들만 5개나 된다. 원래 고령에 병환이 심하긴 했지만, 패륜행위를 한 아들들을 왕건이 살려주자 그 울분으로 세상을 떠났을 만큼 그는 현실이 원망스러웠을 것이다. 

 

견훤은 폭군도 아니었고 호족들을 규합하려 혼인정책도 적극적으로 펼쳤으며 왕건의 목숨을 거두기 직전에 이를 만큼 군사적 능력도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 완벽한 영웅이었어도 내부 단속을 실패하여 허망하게 무너진 사례는 많지만 이 모든 것이 오로지 시대적 사고방식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 견훤 본인의 업보이고 역량부족으로 자초한 것일지, 단지 운이 없었다고 해야 할지는 명확하지 않다.

 

 

왜 경상도에서 싸웠을까

 

후삼국시대 지도를 보면서 항상 들었던 의문점이 백제와 고려가 대치중인 충청권에서 주로 싸워야 정상인데, 큰 전쟁은 대부분 소백산맥을 둘 다 힘들게 넘어와서 경상도 중북부에서 이뤄졌다는 것이다.

 

옛 백제의 전성기를 장식한 곳도 충남과 한반도 중심의 요충지인 경기권이었고, 후백제도 마찬가지로 이들 곡창지대를 잠식하며 북진하는 루트가 고려의 급소를 노리는 실익이 크고 급선무한 일인데, 굳이 긴 보급선을 만들어가며 신라 땅에 대한 깃발뺏기에 치중했다.

 

 

 

후백제 최대 영토와 공격 방향

 

 

즉, 견훤의 평생 전략에서 가장 큰 패착은 알아서 무너지고 있는 신라를 굳이 국력과 시간을 소진해가며 집착했다는 점이다. 항시 후백제가 신라를 핍박하고 고려가 구원오는 패턴으로 인해 대구, 성주, 구미, 안동 등지에서 주요 격전이 벌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어렵게 신라 땅을 차지하고 도읍까지 폭거 유린하고도 광대한 전선 탓에 영향력을 잠시 밖에 유지하지 못하는 한계를 드러냈다. 신라가 가진 통일 삼한의 정통성과 주변의 무주공산부터 먼저 차지해야겠다는 심리가 저변에 깔려있는 조급한 전략이 견훤을 쇠락의 길로 가속화한 역설적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봉건적 간접통치의 한계

 

후삼국시대 최후 전투인 일리천에서 왕건은 10만 대군을 친정하였다고 하고, 후백제도 이에 못지않았다는 것이 기록인데, 반면 나머지 주요 전투들의 병력 규모는 많아야 1만을 넘기 힘들었다는 점에서 갭이 너무 크고 진위를 검증하기 어렵다.

 

후백제가 차지한 땅의 면적은 고려보다 적었어도, 알짜 곡창지대를 베이스로 한 인구부양력과 경제력에서 우위를 가졌다는 것이 학계의 주된 시각이다. 그럼에도 견훤이 서라벌 입성을 위해 사활을 건 대야성 전투에서 총동원한 병력이 1만이며 그마저 3번에 걸쳐 20년 만에 겨우 얻었다는 점을 볼 때 후삼국시대 자체가 병력 동원에 있어서 운신의 폭이 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애초에 신라 정권부터 중앙정부가 동원할 수 있는 군대가 충분하지 않아 지방 토호 세력을 제어하지 못해서 전국시대로 이어졌기 때문에 신라의 구체제를 답습하는 형태일 수밖에 없는 후백제도 이러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후삼국시대 호족과 정부의 관계는 중국의 봉건제도보다 훨씬 결속력이 약했고 이익을 위해 언제든지 갈아탈 수 있는 계약적 형태를 띠며, 견훤이 코 앞에 있는 나주를 빼앗기고도 한참을 회복하지 못한 것도 호족들 간의 합종연횡에 의해 강력한 중앙집권 구축이 어려워진 결과라 볼 수 있다.

 

정복군주의 웅대한 꿈에 비해 주변의 현실은 눈치나 보는 방관자로 넘쳐났고 궁예는 신정을 접목한 전제왕권으로 타파하려 했지만 실패했으며, 견훤 또한 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했다.

 

궁예가 축출되는 혼란을 틈타 견훤이 고려를 접수하여 빠르게 삼한 통일을 이룩했다면 개인적인 비극은 겪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어떤 한계가 있든 간에 견훤은 긴 시간 동안 과업을 끝내지 못했고 이상을 제시하지 못했으며 거듭된 실패로 모두가 지쳐갔다. 표면적으로는 천륜을 거스른 아들과 주변인들의 배신 때문이지만, 후삼국시대의 시작과 끝이 그의 손에서 이뤄졌다는 점에서, 끝없는 희생을 양산하는 긴 전쟁을 몰고 온 풍운아의 결자해지는 시대의 단죄로 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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